하나님은 존재와 지적 속성과 도덕적 속성에서 우리와 어떻게 닮으셨는가?
설명과 성경적 근거
공유적 속성(communicable attributes)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더 많이 나누어 주시거나 인간 안에 반영되게 하시는 성품이다. 그러나 공유적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의 구분은 절대적이지 않다. 어떤 속성을 어느 범주에 넣는지보다 각 속성의 성경적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인간은 하나님의 성품을 어느 정도 닮을 수 있지만, 그분의 무한하고 완전한 성품을 그대로 소유하지는 못한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 지식과 지혜, 영성과 불가시성을 각각 구분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여러 속성을 조립하여 이루어진 분이 아니라 온전히 통일된 한 분이시다. 따라서 서로 밀접한 속성을 따로 다루거나 하나의 속성의 여러 측면으로 설명하는 차이 자체에 큰 교리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공유적 속성의 전체 분류는 존재에 관한 속성, 지적 속성, 도덕적 속성, 목적에 관한 속성, 종합적 속성의 다섯 범주이다. 이 장은 앞의 세 범주에 속하는 열세 항목을 다룬다. 목적에 관한 속성은 의지와 자유와 전능이며, 종합적 속성은 완전성과 복되심과 아름다움과 영광이다. 각 속성을 연구할 때에는 그 의미와 성경적 근거뿐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그 성품을 본받을지도 살펴야 한다.
A.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속성
1. 영성
하나님의 영성(spirituality)은 하나님이 어떤 물질로도 이루어지지 않으시고 부분이나 공간적 차원을 갖지 않으시며, 우리의 육체적 감각으로 지각할 수 없고 다른 모든 존재 방식보다 탁월하게 존재하신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예배 장소를 묻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말씀하셨다(요 4:21–24). 참된 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특정한 장소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의 내적인 영적 상태이다.
하나님을 무한히 크거나 무한히 작은 물질적 존재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분의 일부가 여러 장소에 나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존재가 어디에나 계시며, 어떤 공간도 하나님을 둘러싸거나 담을 수 없다(시 139:7–10; 왕상 8:27). 또한 하나님은 에너지나 생각, 공기나 수증기처럼 피조세계의 어떤 요소와 동일한 분도 아니다. 인간의 영도 피조된 존재이므로 하나님의 영적 존재 방식과 완전히 같지는 않다.
하나님을 피조물의 형상으로 만들어 예배하지 말라는 계명은 이 차이를 보호한다(출 20:4–6). 금송아지로 하나님의 힘을 표현하려 해도, 그 형상은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와 사랑과 거룩함을 심각하게 왜곡한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성품을 어느 정도 반영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본질을 피조물의 형태로 규정하는 것은 다르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지키시며 사람들이 그분을 참되게 알고 예배하기를 원하신다.
영성은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 방식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비공유적 속성으로 분류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영을 주셔서 예배하고 주님과 연합하며 성령의 증언을 받게 하셨다(고전 6:17; 롬 8:16). 죽을 때 우리의 영은 주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간다. 이런 제한된 유사성 때문에 영성을 공유적 속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2. 불가시성
하나님의 불가시성(invisibility)은 하나님의 영적 존재 전체, 곧 그분의 본질 전부를 우리가 볼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는 부분적으로, 오는 시대에는 더 충만하게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뜻이다. 성경은 아무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고 하나님은 사람이 볼 수 없는 분이라고 말한다(요 1:18; 딤전 1:17; 6:16). 이는 하나님이 자신을 어떤 방식으로도 나타내지 않으신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신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누구에게 계시하실지 주권적으로 결정하신다는 점과 우리가 날마다 의식적으로 그분과의 교제를 구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운다(마 11:27; 렘 29:13). 하나님을 안다고 해서 그분과의 교제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했지만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수는 없었다는 기록은, 하나님의 본질 전체를 보는 것과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외적 현현을 보는 것을 구별하게 한다(출 33:11, 20–23). 구약의 신적 현현(theophany)은 하나님께서 보이는 형태로 자신을 나타내신 사건이다.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나타나신 일, 구름기둥과 불기둥, 이사야가 본 환상 등이 그 예이다. 성경의 다양한 비유와 창조세계도 하나님을 알게 하지만, 하나의 비유만으로 하나님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현현보다 훨씬 충만하게 하나님을 나타내신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와 본체의 정확한 표현이시다(골 1:15; 히 1:3). 예수님이 자신을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분을 통해 하나님을 참되게 알 수 있음을 뜻한다(요 14:9).
장차 성도는 하나님을 직접 뵙게 된다(마 5:8; 계 22:3–4). 그러나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신성을 어떤 방식으로 보게 되는지는 지금 분명히 알 수 없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남김없이 보는 것은 아니지만, 그 만남은 참되고 분명하며 실제적인 만남이다. 하나님을 뵈어 복과 기쁨을 누리는 것을 지복직관(beatific vision)이라고 한다. 그분을 뵙는 일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친밀한 교제의 완성이며, 우리가 그분을 닮게 되는 일과 연결된다(요일 3:2).
B. 하나님의 지적 속성
3. 지식과 전지성
하나님의 지식(knowledge), 곧 전지성(omniscience)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실제로 존재하거나 일어나는 모든 것, 그리고 가능한 모든 것을 하나의 나뉘지 않는 영원한 행위로 완전히 아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지식이 완전하시며 모든 것을 아신다(욥 37:16; 요일 3:20). 이 정의에는 지식의 대상뿐 아니라 하나님이 아시는 방식도 포함된다.
a. 하나님은 자신을 완전히 아신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완전히 아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자신뿐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시며,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영이 아신다(고전 2:10–11). 하나님의 자기 지식에는 부족함이나 어두움이 없다. 인간이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하나님 자신의 지식에도 한계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
b. 하나님은 실제로 존재하고 일어나는 모든 것을 아신다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눈앞에서 숨을 수 없으며,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뿐 아니라 미래도 아신다(히 4:13; 사 46:9–10). 그분은 우리의 필요와 머리카락의 수까지 아신다(마 6:8; 10:30). 시편 139편은 앉고 일어서는 행동, 마음의 생각, 아직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말,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진 삶의 날들까지 하나님이 아신다고 고백한다. 그분의 지식은 큰 사건에만 머물지 않고 개인의 삶의 세부까지 미친다.
c. 하나님은 가능한 모든 것을 아신다
하나님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도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 어떻게 되었을지 아신다. 다윗이 그일라에 머물렀다면 사울이 내려오고 그 주민들이 다윗을 넘겨주었을 것이라고 하나님은 알려 주셨다. 그러나 다윗이 떠났으므로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삼상 23:11–13). 예수님도 두로와 시돈에서 자신의 기적들이 행해졌다면 그들이 회개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1:21).
하나님이 자신을 완전히 아신다는 사실은 자신이 행하실 수 있는 모든 일도 아신다는 뜻이다. 따라서 창조하지 않으신 가능한 세계와 피조물에 대해서도 완전한 지식을 가지신다. 하나님의 지식은 우리가 관찰하는 현실의 범위를 훨씬 넘어선다.
d. 하나님은 언제나 모든 것을 완전히 의식하신다
하나님이 하나의 단순한 행위로 아신다는 말에서 단순함은 부분으로 나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사실을 하나씩 계산하거나 추론하여 결론을 얻지 않으시며, 잊고 있던 정보를 다시 떠올리지도 않으신다. 모든 지식이 항상 완전하게 그분의 의식에 있다. 또한 이 지식은 영원하므로 새롭게 증가하거나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새 사실을 배워야 한다면 그전에는 전지하지 않으셨다는 문제가 생긴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고 하신 말씀은 지식 자체를 잃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용서한 죄를 다시 우리와의 관계에서 문제 삼지 않으신다는 뜻이다(사 43:25). 자녀를 제물로 태우는 일이 하나님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았다는 표현도 그 가능성을 몰랐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렘 7:31; 19:5). 하나님은 이미 그런 행위를 금하셨다(레 18:21). 이는 그 행위를 원하거나 승인하지 않으셨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e. 열린 신론과 미래의 인간 선택에 대한 지식
열린 신론(open theism)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 선택의 결과를 확정적으로 알지 못하신다고 주장한다. 리처드 라이스와 클라크 피녹은 하나님이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아시지만 아직 존재하지 않는 자유로운 미래의 선택은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이 견해에서 미래는 하나님에게도 완전히 확정되어 있지 않다.
그루뎀은 이런 전지성의 재정의가 성경의 예언과 충돌한다고 비판한다. 인간이 결정을 내릴 때마다 하나님이 그 결과를 새롭게 배우신다면, 하나님은 모든 미래의 선택을 영원히 아시는 분이 아니게 된다. 저자는 이사야 40–48장에서 참 하나님이 우상과 구별되는 중요한 근거로 미래를 미리 아시고 선포하시는 능력이 제시된다고 강조한다.
하나님은 고레스를 통한 회복과 같은 역사적 사건을 미리 말씀하시며, 처음부터 종말을 알리고 자신의 뜻을 이루겠다고 선언하신다(사 44:24–28; 46:9–10). 이런 예언은 인간의 선택을 포함하는 미래에 관한 확실한 선언이다. 따라서 그루뎀은 성경의 예언을 단순히 가장 가능성 높은 미래에 대한 추측으로 이해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전지성에 미래의 자유로운 인간 행동에 대한 지식도 포함된다고 결론 내린다.
f. 하나님이 미래의 선택을 아신다면 우리의 선택은 어떻게 자유로운가
그루뎀은 어거스틴의 합리적 자기 결정(reasonable self-determination)이라는 표현을 통해 인간 선택의 실제성을 설명한다. 우리는 무엇을 할지 생각하고 의식적으로 결정하며, 그 결정에 따라 행동한다. 사건은 우리의 선택과 무관하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일어난다. 따라서 생각과 결정과 행동은 실제적이며 영원한 의미를 가진다.
다만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행동을 미리 아신다면, 인간의 선택을 아무 제한도 없는 절대적 자유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루뎀은 브루스 웨어가 말하는 성향에 따른 자유(freedom of inclination), 곧 가장 강한 성향이나 깊은 욕구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자유라는 설명을 받아들인다. 이 장은 예지와 자유의 관계를 모두 해결하려 하지 않으며, 더 자세한 논의를 하나님의 섭리를 다루는 제16장으로 넘긴다.
4. 지혜
하나님의 지혜(wisdom)는 하나님이 언제나 최선의 목적과 그 목적에 이르는 최선의 수단을 선택하신다는 뜻이다. 전지성이 모든 것을 아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면, 지혜는 그 지식에 따른 결정과 행동이 하나님의 궁극적 관점에서 최선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창조세계의 다양성과 질서는 하나님의 지혜를 보여 준다(시 104:24).
구속의 계획에서도 하나님의 지혜가 드러난다.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어리석게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믿는 사람을 구원하시고 인간이 자신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신다(고전 1:18–30). 또한 유대인과 이방인처럼 서로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는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다양한 지혜가 드러난다(엡 3:6–10). 교회는 인종과 문화와 사회적 계층의 장벽을 넘어 하나 됨으로써 이 지혜를 나타내야 한다.
하나님은 자녀의 삶에서도 모든 일을 선을 위해 사용하시며,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신다(롬 8:28–29). 바울의 육체의 가시가 제거되지 않은 일도 하나님의 지혜를 신뢰하도록 이끈다(고후 12:7–10). 이 약속은 모든 경험이 그 자체로 즐겁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고통스러운 경험까지 그분의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신다는 뜻이다.
인간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말씀을 읽고 순종함으로 그분의 지혜를 부분적으로 반영할 수 있다(약 1:5; 시 19:7).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며, 참된 지혜는 겸손과 온유와 평화를 낳는다(잠 9:10; 약 3:13–18).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완전히 공유하지 못한다. 고난의 이유를 알 수 없을 때에도 신실하신 창조주께 자신을 맡기고 선을 행해야 한다(벧전 4:19).
5. 진실성과 신실성
하나님의 진실성(truthfulness)은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모든 지식과 말씀이 참되고 진리의 최종 기준이라는 뜻이다.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은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이며, 다른 신들은 우상이다(렘 10:10–11; 요 17:3). 참 하나님이 어떤 분이어야 하는지를 인간의 생각이 최종적으로 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자신이 완전한 기준이시며, 인간에게는 그분을 알아볼 수 있는 지식의 반영이 주어져 있다.
하나님은 현실을 잘못 이해하거나 판단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과 일치할 때 그것은 참되다. 하나님의 말씀도 외부의 더 높은 기준에 비추어 참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진리를 판단하는 최종 기준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라고 말씀하셨으며, 성경은 하나님이 거짓말하실 수 없다고 가르친다(요 17:17; 딛 1:2; 히 6:18).
신실성(faithfulness)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행하시고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뜻이다(민 23:19). 믿음은 하나님을 말씀 그대로 신뢰하며 그분이 약속을 지키실 것을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식과 말씀이 완전히 참되기 때문에 신자는 그분의 약속에 자신의 삶을 맡길 수 있다.
성도는 하나님과 창조세계에 관한 참된 지식을 추구함으로 진실성을 본받는다. 성경의 인도 아래 자연과 사회와 인간을 연구하면서 실제로 참된 것을 발견할 때, 하나님이 이미 알고 계신 진리를 배우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며, 지식의 성장은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새로워지는 삶과 연결된다(골 3:10).
또한 말과 마음에서 거짓을 버리고 진실을 사랑해야 한다(엡 4:25; 시 15:2). 거짓말이 잘못인 것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기 때문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과 반대로 행동하여 그분의 영광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은 진실하게 말하고 자신의 말에 신뢰를 줄 수 있어야 한다.
C.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
6. 선하심
하나님의 선하심(goodness)은 하나님이 선의 최종 기준이며, 그분의 존재와 모든 행위가 인정과 찬성을 받기에 합당하다는 뜻이다. 무엇이 선한지를 최종적으로 정하는 기준은 인간의 취향이나 하나님 밖의 법칙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승인하시는 것은 그분의 성품과 일치하므로 선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선을 알아보고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을 어느 정도 주셨다.
창조하신 모든 것이 매우 좋았다는 선언과 하나님이 선하시며 선을 행하신다는 고백은 하나님의 존재와 행동의 선함을 함께 보여 준다(창 1:31; 시 119:68). 모든 좋은 선물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약 1:17). 하나님은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시며, 징계도 그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마 7:11; 히 12:10). 따라서 성도는 모든 형편에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승인하시는 선을 모든 사람에게 행함으로 이 성품을 본받는다(갈 6:10). 또한 하나님이 모든 선의 근원이시므로 궁극적으로 구할 가장 큰 선은 하나님 자신이다(시 73:25–26). 사랑과 긍휼과 은혜와 인내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그 선하심이 특정한 관계와 상황에서 나타나는 방식을 설명한다.
7. 사랑
하나님의 사랑(love)은 하나님이 영원히 다른 이들에게 자신을 내어 주신다는 뜻이다. 사랑은 다른 이들의 유익과 복을 위해 자신을 주는 성품이다. 성부는 창세 전부터 성자를 사랑하셨으며, 성자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아버지를 향한 사랑을 나타내셨다(요 17:24; 14:31). 그루뎀은 성부와 성자의 사랑이 성령과의 관계에도 해당한다고 설명하되, 이 대목에서는 그것이 같은 방식으로 명시적으로 진술되어 있지는 않음을 인정한다.
하나님의 자기 내어 주심은 죄인을 위한 구원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게 하셨고, 아들을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보내셨다(롬 5:8; 요일 4:10). 그리스도의 사랑은 막연한 인류애에 그치지 않고 자신을 내어 주신 구주를 믿는 각 사람에게 인격적으로 적용된다(갈 2:20).
우리는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며, 이웃에게 자신을 내어 줌으로 이 성품을 본받는다(마 22:37–39; 요일 4:19; 5:3). 우리의 사랑과 순종은 실제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다(사 62:5; 습 3:17). 서로 사랑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세상에 드러내며,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하나님의 사랑을 특별히 반영한다(요 13:35; 마 5:43–48).
8. 긍휼과 은혜와 인내
긍휼(mercy), 은혜(grace), 인내(patience)는 각각 독립된 속성으로 설명할 수도 있지만, 특정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이해할 수 있다. 긍휼은 비참함과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베푸시는 선하심이고, 은혜는 형벌만 받아 마땅한 사람에게 베푸시는 선하심이며, 인내는 죄인에 대한 형벌을 일정 기간 미루시는 선하심이다. 성경은 이 세 성품을 자주 함께 언급한다(출 34:6; 시 103:8).
긍휼은 고통받는 사람의 곤경과 필요에 주목한다. 예수님께 고쳐 달라고 부르짖은 맹인들은 긍휼을 구했으며, 하나님은 환난 가운데 우리를 위로하시는 자비의 아버지이시다(마 9:27; 고후 1:3–4).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때를 따라 돕는 긍휼을 구하고, 받은 위로로 다른 사람을 위로해야 한다(히 4:16).
은혜는 받을 자격이나 공로가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자유롭게 베푸시는 호의이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은혜를 베풀 의무를 지지 않으신다(출 33:19). 죄인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주어지는 선물이다(롬 3:23–24; 11:6). 은혜를 받는 수단인 믿음은 자기 공로를 의지하지 않고 다른 분을 신뢰하는 태도이다(롬 4:16).
은혜는 처음 죄를 용서받을 때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성도의 삶과 사역 전체가 계속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한다. 바울은 자신의 존재와 사역을 하나님의 은혜로 설명했으며, 교회도 선교의 완성을 그분의 은혜에 맡겼다(고전 15:10; 행 14:26).
하나님의 인내는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신다는 뜻이 아니라,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즉시 형벌하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오래 참으심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진 본보기로 설명한다(딤전 1:16). 성도도 쉽게 화내지 않고 고난 가운데 인내해야 한다(약 1:19; 벧전 2:20). 이런 인내는 하나님이 가장 좋은 때에 자신의 약속과 목적을 이루실 것을 신뢰할 때 자란다.
9. 거룩하심
하나님의 거룩하심(holiness)은 하나님이 죄로부터 분리되어 계시며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데 전적으로 헌신하신다는 뜻이다. 거룩함에는 악으로부터의 분리와 하나님을 향한 헌신이라는 두 측면이 함께 있다. 성막과 성소, 제사장, 안식일이 거룩하다고 불린 것은 일상적 용도에서 구별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드려졌기 때문이다(출 20:11; 26:33; 29:44).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며, 그분의 보좌를 둘러싼 스랍들은 그 거룩하심을 찬양한다(사 6:3). 하나님의 거룩함은 백성이 따라야 할 모범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거룩하므로 백성도 거룩하라고 명하셨으며, 그들을 거룩한 나라로 부르셨다(레 19:2; 출 19:6). 그러므로 거룩함은 단지 외적인 종교 활동이 아니라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다.
신자는 몸과 영을 더럽히는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 그분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도록 자라야 한다(고후 7:1; 히 12:10, 14). 교회 전체도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며, 그리스도는 교회를 거룩하고 흠 없는 공동체로 세우신다(엡 2:21; 5:26–27). 스가랴가 말한 말방울과 솥까지 거룩해지는 날은 모든 삶이 죄에서 정결하게 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데 드려질 것을 보여 준다(슥 14:20–21).
10. 평화와 질서
하나님의 평화(peace)는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와 행위에서 모든 혼란과 무질서로부터 분리되어 계시면서, 무수한 일을 동시에 완전한 질서와 통제 가운데 계속 행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혼란의 하나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나님이시다(고전 14:33). 구약의 샬롬(shalom)은 상황과 관계 전반의 온전함과 안녕을 포함한다.
평화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정지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계속 일하신다(시 121:4; 요 5:17). 초대교회도 성장하고 활발히 활동하면서 평안을 누렸다(행 9:31). 무한한 활동을 질서 있게 수행하시는 하나님의 평화는 그분의 지혜와 지식과 능력에 연결된다.
성도는 성령의 열매인 평화와 절제를 통해 이 속성을 본받는다(갈 5:22–23). 하나님을 따르는 삶에서는 분주한 활동 중에도 질서와 자기 절제가 자라며,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평화를 추구하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나타난다(롬 14:17).
11. 의로우심과 공의
하나님의 의로우심(righteousness)과 공의(justice)는 하나님이 언제나 옳은 것에 따라 행동하시며 그분 자신이 옳음의 최종 기준이라는 뜻이다. 영어에서는 두 단어를 사용하지만, 구약의 히브리어와 신약의 헬라어에서는 같은 어군으로 표현되므로 하나의 속성으로 다룰 수 있다. 하나님은 불의가 없으시며 온 세상을 바르게 심판하신다(신 32:4; 창 18:25).
공의는 죄를 합당하게 다루실 것을 요구한다. 죄는 상이 아니라 형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시면서도 의로우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죄의 형벌을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죄를 그냥 지나치신 것이 아님을 보여 주며, 하나님이 의로우시면서 동시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의롭다 하시는 분임을 드러낸다(롬 3:25–26).
옳음의 기준은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이며, 하나님보다 높은 외부 기준이 그분을 심판하는 것은 아니다. 피조물은 창조주의 모든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바울의 토기장이와 진흙 비유, 욥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응답은 인간 지식의 한계와 창조주의 위엄을 기억하게 한다(롬 9:20–21; 욥 38–40장).
하나님이 의로우실 뿐 아니라 전능하시다는 사실은 감사의 이유이다. 의로우셔도 그 뜻을 실행할 능력이 없다면 정의의 최종 승리를 보장할 수 없고, 무한한 능력이 있어도 의로우심이 없다면 피조물에게 소망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완전한 공의와 그것을 이루실 능력을 함께 가지시므로 신자는 그분을 신뢰하며 찬양할 수 있다.
12. 질투
하나님의 질투(jealousy)는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지키기 위해 계속 열심을 내신다는 뜻이다. 여기서 질투는 다른 사람의 좋은 것을 시기하는 악한 감정이 아니라, 합당한 영광과 관계를 보호하려는 열심을 가리킨다. 하나님이 우상 숭배를 금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를 거짓 신에게 돌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출 20:5; 34:14).
인간이 자기 영광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만 속한 영광을 차지하려 하기 때문에 잘못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찬양과 영광을 받기에 무한히 합당하시므로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시는 것이 옳다(사 48:11). 이 속성을 본받는다는 이유로 인간의 교만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성도는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인정하고 기뻐하며, 그분을 참되게 예배해야 한다.
13. 진노
하나님의 진노(wrath)는 하나님이 모든 죄를 강하게 미워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선하고 의로운 것을 사랑하신다면 자신의 도덕적 성품을 거스르는 악을 미워하시는 것은 마땅하다. 따라서 진노는 거룩하심과 공의에 밀접하게 연결된다.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에 대한 진노뿐 아니라 신약도 불경건과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분명히 가르친다(출 32:9–10; 요 3:36; 롬 1:18).
하나님이 죄를 전혀 미워하지 않으신다면 악을 기뻐하시거나 적어도 악에 무관심하신 분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미워하시는 진노도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가 된다. 성도는 악과 불의와 죄를 미워함으로 이 속성을 바르게 반영한다. 진노를 다른 속성들과 분리해서 바라보면 두려움만 남지만, 하나님의 선하심과 거룩하심 안에서 이해하면 악을 끝내 심판하실 소망을 준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장차 올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는다(살전 1:10). 본래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에 마땅한 진노를 담당하셨기 때문이다(엡 2:3; 롬 3:25–26). 그러므로 진노에 관한 묵상은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감사로 이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오래 참으심과 함께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심판을 지연하심으로 죄인이 회개하도록 이끄신다(시 103:8–9; 롬 2:4). 그러나 그 인내가 심판의 취소를 뜻하지는 않는다. 주의 날은 반드시 오며, 하나님은 마침내 모든 불의를 심판하실 것이다(벧후 3:9–10). 성도는 그 인내에 감사하고 복음을 전하며, 불의가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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